水鏡칼럼-고려거란전쟁과 양규 장군의 불퇴전·애민정신
거란 40만대군에 맞서 흥화진 지켜내고 포로 3만명 구해낸 ‘구국의 영웅’
지난 3월 KBS2 TV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이 종영됐다. 드라마 장면 중 많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장면이 있었다. 바로 고려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를 지낸 양규(楊規) 장군이 거란군과 전투를 벌이다 장렬하게 전사(戰死)한 장면이다. 이 드라마를 통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양규 장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면서 그에 대해 열광하고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지금까지 고려거란전쟁에서 양규 장군의 활약은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 등에 비해 덜 알려졌다. 하지만 조선 초기 집현전 유학자였던 양성지(梁誠之)가 세조에게 위대한 업적을 세운 역대 장군들의 위패를 모시자고 건의했을 때, 신라의 김유신, 고구려의 을지문덕, 고려 강감찬과 함께 양규 장군도 포함했다. 흥화진(興化鎭)을 끝까지 지켜내려고 한 양규 장군의 활약상과 애민(愛民)정신을 이제부터라도 새겨 볼 필요가 있다.
●고려와 거란, 장기전을 시작하다
거란족은 원래 만주 지역에 흩어져 살던 유목민들이었다. 여러 부족으로 갈라져 살았다. 그러다 10세기 초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라는 지도자가 등장해 흩어진 부족들을 통합해 세운 국가가 거란(契丹)이다. 거란은 ‘요(遼)’라고도 했다.
요의 건국자 야율아보기(재위 : 916~926)는 중국 동북부에서 활약하다 당(唐)나라가 쇠약해진 틈을 타 거란의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916년 황제라 칭하고, 임황(림한臨漢·료하상류遼河上流)에 도읍하여 국호를 대요(大遼)라 하였다. 922년(고려 태조5)에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왔다. 주위의 여러 지방을 침략하여 926년 드디어 발해(渤海)를 멸망시키고 그곳을 동단국(東丹國)이라 하여 맏아들을 보내 다스리게 하고 개선하는 도중 병들어 사망했다.
그런데 거란과 송(宋)나라가 군사적으로 맞섰다. 당(唐)이 멸망하고 송이 중국을 통일하기 전, 거란은 후진(後晉)에 군사적 도움을 주고 만리장성 이남의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할양받았다. 중국을 통일한 송은 이 지역을 되찾고 싶었고 결국 거란과 충돌하게 됐다. 이에 거란은 송과 전면전을 벌일 준비를 하게 된다.
송과 고려가 합심해 거란이 공격하지 못하게 하자, 거란은 993년(고려 성종 12년)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 당시 고려는 거란의 침공 의도를 파악했고, ‘고려 외교관의 대명사’ 서희(徐熙)를 보내 거란 장수 소손녕(蕭遜寧)과 외교 담판을 벌였다. 그 결과, 고려는 송과 맺은 외교 관계를 끊으라는 거란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대신 ‘강동 6주’ 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서희는 994년부터 3년간 압록강 동쪽의 여진(女眞)을 축출하고 장흥진(長興鎭)·귀화진(歸化鎭).곽주(郭州)·귀주(龜州)·흥화진 등에 성을 쌓아 강역을 압록강 유역까지 넓혔다.
역사서 '고려사'에 '양규 장군 등이 거란의 40만 대군에도 흥화진을 굳게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적힌 부분. /국사편찬위원회
그러나 고려 조정에서 장군 강조(康兆)가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옹립하는 정변이 일어났다. 거란은 이 사실을 여진족을 통해 뒤늦게 알게 됐다. 거란은 ‘역적 강조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1010년 11월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다시 침공했다. 이른바 2차 고려거란전쟁이다. 압록강을 건넌 거란군이 가장 먼저 마주친 건 고려군의 최전방 요새 흥화진(현재 평안북도 의주 지역)을 지키고 있던 양규였다.
●거란군과 끝까지 처절하게 싸운 양규
흥화진은 고려가 강동6주를 얻은 뒤 이 지역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995년에 만든 요새이다. 흥화진은 거란군이 한반도로 손쉽게 진격하려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목에 있었다.
1010년 11월16일 거란은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고 흥화진을 포위했다. 이때 양규는 정성, 이수화, 장호 등 휘하 장수들과 흥화진을 끝까지 사수했다. 그러자 거란 황제 야율융서(耶律隆緖, 요의 제6대 황제 성종)는 “목종은 우리 신하였는데 고려 장군 강조에게 시해당했으니 강조를 잡아 보내면 회군하겠다”며 항복을 권했다.
하지만 양규는 이를 아주 단호하게 거절했다. 거란의 황제 야율융서는 양규가 항복하지 않으리란 걸 알고 흥화진에서 방향을 틀어 통주(通州)로 진격했다.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은 통주성 남쪽에서 거란군과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고려군은 크게 패했고, 강조가 거란군의 포로로 끌려갔다. 이후 거란군은 강조가 쓴 듯이 위조한 편지를 흥화진으로 보내 양규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양규는 “나는 왕명을 받고 왔으니, 강조의 명령을 받들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오히려 양규는 1010년 12월16일 군사 700여 명을 거느리고 흥화진에서 나와, 통주에 있던 고려 병사 1000명을 구해냈다. 그러고 거란군 6000여 명과 전투를 벌여 곽주성을 탈환하고, 그곳에 있던 고려 백성 7000여 명도 구해냈다. 이렇듯 양규의 치열한 저항은 계속됐다.
대하 사극 '고려거란전쟁'에서 병사가 밥풀도 떼지 못하고 흥화진 전투에 나서는 장면. /KBS
흥화진 등에서 고려군이 거란과 열심히 싸우고 있었지만, 거란의 주력군은 계속 진격해 개경으로 향했다. 결국 고려 현종은 남쪽으로 급히 피란을 떠났고, 1011년 1월 거란군이 개경에 입성했다. 피란길에서 현종은 거란과 조약을 맺어 전투를 그치고 평화를 회복하는 강화(講和)를 맺었다. 그것도 ‘앞으로 고려 국왕이 직접 거란 조정에 들어가 황제에게 인사를 드린다’는 매우 굴욕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흥화진을 중심으로 한 양규의 전투는 계속됐다. 양규 장군의 활약은 거란군이 서둘러 강화를 맺고 고려에서 철수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양규는 개경에서 철수하는 거란군을 여러 차례 공격하면서도 포로로 잡힌 수많은 고려 백성을 구출했다. 양규가 거란군에게서 구출한 포로는 약 3만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011년 1월28일, 서북면도순검사 양규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은 거란의 주력 부대에 포위되고 말았다. 양규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함께 싸우던 군사도 모두 죽고, 화살도 다 떨어져 전사하고 말았다. 기록에 따르면 양규는 ‘몸을 바쳐 힘껏 싸워 여러 번 연달아 적을 격파하였으나, 고슴도치 털과 같이 화살을 맞아서 전쟁 중에 전사하였다’고 한다.
대하 사극 '고려거란전쟁'에서 양규 장군이 거란군과 싸우다 서서 전사하는 장면. /빅웨일엔터테인먼트
이 장면을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에선 아래와 같이 묘사하면서 화면으로 리얼하게 보여줬다. 야율융서의 항복 요구에 효시(嚆矢: 소리가 나는 화살)로 답하면서 양규는 이내 300보가 남았다는 것을 바라보곤 어떻게든 아율융서를 죽여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거란군의 본대와 백병전을 치른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와 중과부적을 감당하지 못한 결사대는 전멸했지만, 거란군은 양규와 김숙흥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끝까지 분전하여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자 공포감에 가까이 접근하지도 못할 정도로 사기가 가라앉고 양규와 김숙흥은 마지막 최후까지 거란의 본대와 처절한 혈전을 치른다.
결국 양규는 끝내 100보까지 나아가 전신에 피철갑을 뒤집어쓰고 한쪽 팔마저 단검이 박힌 상황에서 반드시 야율융서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나아가는 무시무시한 집념을 보여준다. 오죽하면 거란 병사와 장군들이 이미 피투성이가 된 상태에서도 더 이상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두려워했다. 심지어 거란군의 장군들도 겁을 먹고 물러서서 병사들에게 등을 떠밀고 "빨리 나가서 싸워라"라고 소리 질렀을 정도였는데 이게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 하면, 유목민족으로서 수없이 약탈과 전쟁을 해온 경력이 많고 노련한 거란군의 장수들마저도 두 장군의 분전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공포감에 겁을 먹었다는 것이다.
양규는 단검이 꽂힌 오른팔로 활시위를 당길 수 없어 입까지 써 가며 야율융서를 향해 효시를 쏘지만 불과 10보가 모자랐고, 이에 다시금 야율융서를 저격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결국 소배압이 궁수대를 동원하면서 양규는 한 걸음마다 쏟아지는 화살비를 맞아가면서도 걸어 갔으나, 단 3보를 남기고 마지막 숨을 내쉬며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이때 김숙흥과 함께 마치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화살을 맞고 선 채로 전사하고 말았다.
●역사서 등에 기록이 부족해 알려지지 않은 양규
양규 장군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그에 관한 기록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양규 장군의 출신과 언제 태어났는지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거란에 항전하며 활약한 이야기만 전해지고 있다.
양규 장군의 출신과 생년이 역사서에 보이지 않으며, 1010년(현종 1)부터 그 행적이 확인된다. 그는 목종(穆宗)을 섬겼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형부낭중(刑部郎中)에 이르렀다. 형부낭중, 도순검사 등을 역임한 무신으로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에 올랐다.
형부낭중을 역임하였다는 점, 당시 고려에는 무신을 선발하는 무과(武科)가 시행되지 않았다는 점, 고려 전기까지 군 지휘관은 대부분 문신(文臣)이었다는 점에서 본래 양규는 문신이었음이 유추된다. 이는 강감찬, 윤관 등이 문과(文科)에 급제한 문신이었으면서도 군사 방면에서 뛰어난 활약을 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양규는 문신 출신 장군이라고 할 수 있다.드라마를 통해 많은 이들이 양규 장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는데, 이 관심과 사랑이 이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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